경계도시2 - 누가 레드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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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 - 누가 레드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 시사회에 다녀왔다.

이 다큐영화는 송두율이라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한국 사회가 유린하고 무릎 꿇게 만들고, 그 뒤 동시에 합심이라도 한 듯 집단적으로 망각한 사건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처참한 지적 수준과 앙상한 교양을 끄집어 낸다. 여기에는 진보세력이나 시민사회단체 세력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물론 '개인보다는 운동대오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명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송두율씨에게 사실상 전향을 '훈수'한 것은 진보세력조차 레드콤플렉스를 뛰어넘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극우세력은 성난 얼굴로 송두율씨에게 전향하라고 윽박지르고, 진보세력은 안타까운 얼굴로 전향을 요청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가보안법에 희생당하고, 국가보안법을 온몸으로 반대하지만, 결국 국가보안법의 프레임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비전향장기수 김선명씨에 관한 영화 <선택>에서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전향을 공작할 때 하는 말이 있다. 전향공작원들은 '종이 쪼가리 한장(전향서)에 왜 목숨을 거느냐'며 회유한다. 양심의 자유가 '종이 쪼가리 한장' 만큼 가벼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2003년 송두율씨를 바라보는 진보세력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당시 극우세력의 총공세에 직면한 진보세력의 고충도 우리는 차분히 헤아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난국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송두율씨의 사실상 전향을 선택한 것에는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 한편으론 양심의 자유 어쩌고 하는 매우 추상적인 논리로 대중들을 설득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송두율씨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를 '거물 간첩'으로 믿기로 해버렸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집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희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총체적 난국일수록 진보는 원칙을 고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진보의 잘못은 '대오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저버려선 안될 원칙에 눈감은 것이라고 본다. 다큐 속 대책회의 장면에서 소설가 서해성씨는 사실상 전향을 '기술적인 것, 테크니컬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물론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눈 딱 감고 전향서 한장 쓰고 나가서 다시 빨갱이 짓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던 전향공작원들의 회유가 나는 떠올랐다.(진보세력과 군사정권의 전향공작원을 같은 선상에서 문제 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전향이 '기술적인 문제'로 생각될 수 있다는 발상만으로 이미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 게 아니냐는 거다.)

이 다큐영화를 보고나서 진보세력조차 집단의 논리로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켰다고 비판하고 자성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감상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우파적인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진보세력의 오류도 문제이지만, 진보세력을 그러한 오류에 빠지도록 몰아세운 극우세력과 국가기관, 언론 등의 선동, 그리고 그 선동에 너무 쉽게 휩쓸린 우리에게도 문제의 책임은 있다는 거다.

예컨대 이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순수하게 학자적 입장에서 조선일보의 인터뷰에 응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일보가 진보세력을 왜곡 음해하는 데 이용당한 진보적 지식인을 우리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진보적 지식인이 조선일보의 인터뷰에 응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조선일보가 지저분한 방법으로 진보적 지식인을 악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보적 지식인을 비판하고 자성을 요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조선일보의 악행을 더 공세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송두율씨의 양심의 자유보다는 '운동대오'를 보호하려고 했던 진보세력의 대처를 우리는 잘못이라고 비판할 수 있으나, 송두율씨를 먹잇감 삼아 한국 사회를 극우적 광기 상태로 몰아간 극우세력과 국가기관, 언론 등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겨냥하고 문제제기 해야 한다는 거다.

<경계도시2>를 보면서 나는 송두율씨보다는 그의 부인 정정희씨에 주목하게 됐다. 대책회의 중에 송두율씨는 오히려 침묵하는 쪽에 가까웠고, 정정희씨의 발언이 많았다. 수세에 몰린 진보세력이 사실상 전향을 강권하게 되자 대책회의 중 정정희씨는 이런 취지로 말한다.
"그건 사실상 전향을 하란 말인데. 저는 그것은 반대합니다. 설사 송두율씨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도 저는 반대하겠습니다."
그 장면에서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송두율씨 본인보다 더 송두율의 양심을 보호하려고 하는구나. 강한 여자다. 남편이자 동지 송두율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확 와닿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고 눈물을 흘리는 송두율씨의 등을 토닥거려줄 때 따뜻한 엄마의 손길을 보았다. 송두율씨가 출소할 때 옆에서 꼬옥 손을 잡고 걸어나오는 장면에서는 평생의 반려자를 보았다. 출소 후 송두율씨의 고향 제주도를 함께 찾아가 그의 팔짱을 끼고 다니던 모습에서는 연애에 푹 빠진 아가씨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반성한다.
2008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새해 화두는 이념대로 살아가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 달린 댓글에 답글을 쓰면서 "주사파는 커밍아웃 거부하면서도 이념대로 잘 살잖아요"라고 적었다. 주사파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들의 양심의 자유를 조롱한 것이다. 반성하고 사과한다.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더 신중히 숙고하고, 존중하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