땐뽀걸즈 : 추억이라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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땐뽀걸즈 : 추억이라도 괜찮아

청춘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특히 '10대'가 주요 인물인 영화라면 챙겨보려고 한다. 영화에서는 주로 고등학생으로 나오는데, 10대들을 모두 '학생'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탈학교 청소년들을 배제하는 것이므로 '청소년'이나 '10대'라고 하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일테니까.

여하간 10대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나는 울컥울컥 한다. 사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대개 스토리의 얼개나 캐릭터가 진부하다. (어른의 시선으로 본) 10대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여주고, 극복해가거나 현실 앞에 다시 한번 엎어지거나 하는 걸로 전개된다. 그렇다고 가슴 한켠이 아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경험 없이 10대를 지나온 사람은 없을테니까.

'땐뽀걸즈'. 지난 달 광주극장 상영시간표에 있는 걸 봤는데 시간이 안맞아 놓친 다큐멘터리다. 제목부터 포스터까지 단박에 일본영화 '스윙걸스'가 떠올랐다. '스윙걸스', '린다린다린다'류의 영화를 인상깊게 봐서 그런지 내심 기대를 했다.

'땐뽀걸즈'는 다큐멘터리다. 극영화와 같은 각색된 시나리오나 짜여진 드라마는 없다. 어떤 나레이션이나 설명도 없다. KBS에서 방영된 방송분에는 나레이션이 있었다고 하는데, 재편집된 극장용은 오로지 카메라 앞에 있는 인물과 장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참 불친절한 다큐멘터리다. 어떠한 설명이 들어가는 순간 개입할 수 밖에 없는 해석의 여지를 최소화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땐뽀걸즈'는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댄스스포츠동아리에서 춤을 배우는 학생 8명과 그들을 지도하는 체육교사 이규호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각 인물들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일상과 생활의 단편들을 보여줄 뿐이다.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다. 이들의 활달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2014년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현장실습 중 사고로 사망한 서귀포산업고등학교의 이민호 학생도 떠오른다. 이규호 선생님 같은 어른이 더 많았다면 그런 생각이 줄곧 떠나지 않았다.

8명 아이들 중에 나는 '현빈'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가장이 되어야 했던 현빈은 알바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저 땐뽀 연습에 자주 빠지는 현빈에게 담배 끊어라 술 끊어라고 장난치듯 말한다. 이규호 선생님에게 처음 털어놓으면서 현빈은 눈물을 훔친다. 슬프게 어깨를 들썩이는 울음이 아니다. 그냥 왜 흐르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나오는 눈물을 툭툭 닦아낼 뿐이다. 이규호 선생님은 '힘을 내야 한다'거나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거다'는 류의 말은 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줄 알았으면 (땐뽀를) 같이 하자고 말 못했을거라고, '맴이 아프네'라고 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올바른 말을 하기보다는 진심과 공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교훈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연습이 끝나고 환승 몇번 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면서 버스비 1천원씩 나눠주고, 늦은 밤에는 자신의 차로 집에 데려다 주며, 엄마가 입원해 있는 아이에게는 동생들이랑 먹으라며 빵을 사서 들려보내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스스럼 없이 친구처럼 선생님을 대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올바른 사람이라기보다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땐뽀를 배우고 대회를 준비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어떤 상이나 순위가 아니다. 아이들은 즐겁기 때문에 춤을 배우고, 선생님은 '건강한 자극과 자신감'이라는 경험이 될거라 기대한다.

학교축제 때 아이들이 선생님 몰래 준비한 영상편지가 나오자 이규호 선생님은 금방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이들은 무대 뒤에서 생글생글한 웃음을 띠며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고, 이내 아이들도 함께 눈물을 흘린다. 아이들과 선생님에게는 땐뽀걸즈로 함께 했던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간혹 힘이 되는 경험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몇몇은 취업을 할 것이고 몇몇은 대학 진학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땐뽀걸즈 시절처럼 즐거운 시간도 아니고, 오히려 비루하고 참담한 날이 더 많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땐뽀걸즈의 추억과 경험이 그들을 구원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추억은 될 것이다. 막막한 현실 앞에 무릎 꿇고, 포기를 떠올릴 때 '한번 더'를 외칠 수 있는 그 정도 힘은 되어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땐뽀걸즈가 추억이 되더라도 괜찮다. 그 추억은 한낱 감상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버티는 힘이 되어줄 강한 경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