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행 : 두렵지만 한걸음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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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 : 두렵지만 한걸음 한걸음

시놉시스 보고 꼭 봐야지 했던 '초행'. 광주극장 상영시간표를 확인하니, 오늘 아니면 내일 퇴근하고 볼 수 있다. 내일 저녁엔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 보기로. 겨울 광주극장에서 영화 보는 건 추위와의 싸움. 당직 퇴근하고 집에 들러 목도리까지 챙겨 나갔다.

'초행'은 7년차 연인 수현과 지영이 슬슬 결혼을 생각하면서 서로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영화냐 다큐냐 헷갈린다. 아무 정보 없이 봤다면 다큐라고 생각할 만큼 리얼 리얼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김대환 감독이 배우들에게 상황 설명만 하고 거의 모든 대사를 애드리브로 하게 했다고 한다. 감독과 배우의 섬세한 상호작용과 배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할 일. 영화는 두 배우의 리얼 애드리브로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누구나 인생의 길에서 초행이다. 여행에서 초행은 설렘과 기대를 주지만, 인생에서 초행은 늘 불안과 초조함, 막막함으로 가득하다. 특히 결혼이라는 인생중대사를 향한 초행은 오죽할까. 그래서 '나 너무 무서워'라는 지영의 외침은 우리 모두의 인생 대사다.

미술학원 강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수현과 방송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지영은 오래된 커플의 모습 그대로다. 알콩달콩하고 달콤한 연애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익숙한 그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신뢰와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현실의 중압감은 조금씩 틈을 만들고 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낸다.

지영의 아버지는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부동산투자를 한다. 지영과 수현은 지영의 부모님이 방 4개짜리 아파트에 이사한 날 그 집을 방문한다. 수현의 아버지는 삼척의 시멘트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어머니는 식당을 한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하고, 어머니와는 별거중이다. 둘이 있을 때 이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지만, 결혼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각자의 가족은 각자의 가족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수현의 경차를 타고 도로 위를 달리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그 흔한 네비게이션이 없다. 왼쪽으로 가야할지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갈팡질팡한다. 잠깐 세워둔 차가 견인되기도 하고, 삼척으로 가는 길 화장실 때문에 수현이 예전에 알던 식당을 찾아가지만, 폐업으로 문이 닫혀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불확실하고, 어찌어찌 목적지로 향하지만 원하는대로 생각한대로 여정이 순탄하지도 않다. 인생의 초행은 늘 고단하고 낯설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다행히도 수현과 지영은 혼자가 아니다. 수현에게는 지영이 있고, 지영에게는 수현이 있다. 그렇게 함께 초행길에 나선다. 물론 함께 있다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거나 솜사탕 같은 행복감으로 가득찬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혼자일 때보다 갈등이 많아질 것이고, 서로의 차이가 버거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행길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의지하고 도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함께 있다는 것은 수현과 지영의 초행에 더 없는 축복이다. 이들의 초행이 불안하고 가슴 졸이게 하고 다툼도 있고 눈물도 있지만, 어쨌든 잘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은 그들이 곧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수현과 지영이 결혼을 생각하면서 겪는 일들은 그것을 지나온 사람이나 앞으로 지나게 될 사람이나 공감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응원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위로이자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응원이므로.

수현의 어머니는 지영에게 '결혼은 꼭 살아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자신이 지옥같은 결혼생활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서운 지영은 "살아봤는데도 모르면요?"라고 묻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확신이라고 할만한 것을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 시험을 치를 때 우리는 확신에 차서 정답을 고르지만, 채점 결과는 오답인 경우가 있다. 명백히 정답이 존재하는 시험에서조차 우리의 확신은 오판일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확신이라는 것은 본디 뜻이 그러한 것처럼 믿음의 영역이지 어떤 사실이나 진실의 영역은 아니다. 인생에서 정답을 골라내려고 한다면 평생 오답노트만 기록할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정답'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 뿐이다.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 어떠한 정답이나 솔루션이 아니다.

나는 결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행복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선택하는 것이지, 그것이 나와 상대방 인생의 정답인 것은 아니다.

믿음을 갖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랑을 믿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믿는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인내와 실천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관계 안에서 실천적으로 구축된 신뢰는 천국으로 안내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지옥행 급행열차는 면하게 해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초행이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 선택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때로는 되돌아갈 것이고, 때로는 바짝 엎드리기도 할 것이다. 방향은 보이지 않고,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결과를 상정하는 과정이고, 정답을 물으며 걷는 초행길이다. 고단한 초행이 동행이라면 그것이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해보는 것. 나는 그것이 삶의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삼척에서 돌아온 날 수현과 지영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광화문 광장을 걷는다. 그런데 수많은 인파가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렇게 가는 게 맞나?'라고 물으면서 다시 방향을 바꾼다. 그렇게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수현과 지영의 뒷모습에서 영화는 끝난다. 어둡고 어수선한 광장에서 여전히 방향을 잃은 것 같은 그 뒷모습은 바로 우리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인생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것이 방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멈추면 어디에도 방향은 없지만, 일단 가다보면 그것이 방향이 된다. 막막할 땐 잠시 멈춰도 된다. 숨을 고르고 다시 가면 된다. 가보니 막다른 길이거나 벼랑 끝이더라도 실망하지 말 것. 되돌아오면 된다. 가끔은 '에잇 일단 고고'하는 것이 삶의 지혜일 때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