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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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과 조선일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에 격한 비난이 쏟아지는 사태에 대하여.

1. 노회찬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당신에게
일부에서는 소녀시대가 참석한 것에 대해서는 '니들이 뭔 죄가 있겠냐, 소속사가 나쁜 색키'라고 감싸준다. 이런 애정과 관대함의 1할이라도 노회찬한테 베풀었으면 한다. 진정 당신이 노회찬의 지지자였다면.
정치인을 지지하고 말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손바닥 뒤집 듯 하는 것인가? 그게 무슨 지지자인가? 진정한 지지자는 대상이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비판하고 더 철저한 관심과 연대를 보여서 잘못을 바로 잡도록 만든다. 그게 좋은 지지자다.라고 생각한다.
노회찬의 행동이 못마땅하고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건 당연히 각자 자유다. 그런데 '노회찬을 지지했는데 이번에 철회한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정말 지지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권한다. 망설임 없이 노회찬에게 한표를 던지고, 가족과 지인들의 투표까지 독려할 정도로 지지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지금 당신이 할 일은 지지 철회가 아니라 비판과 지지의 유지가 아닐까. 반에서 항상 5등 안에 들던 학생이 어느날 6등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넌 공부해도 안돼'라고 내칠 건가? 그동안 부정행위로 성적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말이다.

2. 조선일보라는 현실적 존재
트위터에서 노회찬의 행동을 비판하는 트윗들이 대세임을 알고는 좀 놀랐다. 그게 그렇게 잘못한 행동일까 싶었다. 조선일보라면 박멸해야 할 암적 존재라거나 민족의 반역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생일잔치에 가서 전두환 같은 작자와 한 자리에서 서서 건배를 하고 히히덕 거리는' 노회찬을 용납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회찬은 공당의 대표이고 정치인이다. 그래서 언론에 잘 보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 생각은 없다. 정치인의 기본 역할은 사회의 갈등을 대변하여 의제화하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정책적, 정치적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대화로 끝날 수도 있고, 몸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고, 단식투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협상과 타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 원칙은 타인에 대한 인정이 우선되어야 가능해진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가치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애초에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없다.
상대가 아무리 사회악이라 하더라도, 현실적 존재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조선일보가 설득과 토론으로 개과천선할 것이라고는 개미 오줌 만큼도 믿지 않는다. 그저 세상에는 저버리면 안되는 원칙이란 게 있다는 거다. 그 대상이 아무리 조선일보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
만약 진보신당이 집권하고 다수당이 되어 조선일보를 폐간시키려 한다거나, 조선일보 노동조합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중권을 낙하산 태워 사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면 이게 좋은 일인가? 나는 조선일보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이런 방식에는 반대한다.
심정적으로는 조선일보 사옥에 불이라도 싸질러버리고 싶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머리 속에서만 하는 거다. 누군가 이 생각을 행동에 옮긴다면, 그는 방화범이지 악을 응징한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는 건 아니다.

3. 조선일보의 프레임
만약 민주노총위원장이 조선일보 창간기념식에 참석했다면 매우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공당의 대표인 노회찬이 한국 주요 신문사의 창간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의례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다. 노회찬이 그곳에서 축사를 하며 조선일보를 찬양한 것도 아니지 않나.
조선일보라서 안된다면, 중앙일보나 동아일보 창간기념식엔 가도 되는 건가? 매일경제는? 한국경제는?
내가 조선일보에 대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티조선운동이 막 불붙기 시작할 즈음인 2000년에, 나는 같은 학과도 아닌 학생들과 함께 조선일보의 친일행적과 전두환 찬양 기사들을 모아서 학내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한국언론의 가면을 홀라당 벗기는 스트립쑈' 이 타이틀은 나의 아이디어였다. 안티조선 전시회였는데 타이틀은 매우 조선일보스럽지 않냐. ㅋㅋ


이 때만 해도 운동권인 총학에서조차 안티조선을 잘 몰랐던 시절이다. 신문의 날에는 도서관 앞에서 '신문권력 제삿상'을 차리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창간기념식장에서 신발을 벗어 방사장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사회악을 응징한 영웅이 되었을까? 아니면 진보신당을 비롯한 진보운동 영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위한 훌륭한 떡밥을 조선일보에 안겨줌으로써 진보정당의 지방선거 전략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다준 반역자가 되었을까?
나는 우리의 사고가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항상 조선일보를 의식하면서 자기검열을 하고, 조선일보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맞춰서 우리의 방식을 선택하는. 결국 조선일보의 프레임 안에서 조선일보를 반대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4. 결벽증
한겨레 20주년 행사에는 당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럼 강 대표도 한나라당 내에서 역적이 되었을까? 저들이 끝없이 추악한 짓을 벌이고도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들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이나 윤리보다는 필요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고, 어디든지 간다.
그렇다고 우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진보정당의 집권을 위해 조선일보와도 손을 잡자는 게 아니다. 우리도 저들에게 보여주는 거다. 우리는 니들의 프레임에서 노는 게 아니라는 거. 니네 프레임 안에서 안 놀아 씨바야. 하고 보여주는 거다.
이러기 위해서는 결벽증을 버려야 한다. 조선일보를 만지기만 해도 암에 걸릴 것처럼 그러지는 말자는 거다. 물론 기분상 그렇기는 하다만. ㅋ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건 매우 올바른 원칙이다. 그런데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게 있다 정도가 맞다. 그러니까 타협할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거다. 타협해야 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타협하냐 안하냐가 아니라, 무엇을 타협할 것이고, 무엇은 타협할 수 없는가다. 이게 현실 아닌가.
노회찬이 트위터에 '조선일보가 초청장을 보내왔으나 침을 뱉어버렸답니다'라고 올렸다면, 몇몇 지지자들은 '역시 노회찬!'하면서 즐거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가지고선 집권은커녕 영원히 3% 정당에 머물 것이다.(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 조선일보에 잘 보여야 한다는 개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5. 노회찬이 아닌 조선일보가 문제
진정 노회찬을 지지하고 조선일보를 반대한다면, 논란에 빠진 노회찬보다는 논란에 빠지게 만든 조선일보를 욕해야 한다. 노회찬의 참석이 못마땅하다면 노회찬을 비판하되, 괜찮은 정치인을 논란에 빠뜨린 조선일보를 더 과격하게 비판하고 더 강력하게 안티하라.

6. 인빅터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인빅터스>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