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39

미투의 익명과 실명 사이

'미투'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미투는 오래 전부터 있었고, 발화되지 않은 미투는 훨씬 더 많다. 미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사회의 주목이 없었을 뿐이다. JTBC 뉴스룸에서 서지현 검사가 출연해 신분과 얼굴을 공개하며 '미투'를 한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미투' 운동의 변곡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 뒤로 이른바 '실명과 얼굴을 깐' 미투는 언론과 우리의 주목을 끌었고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은연중 또는 고의로 '실명' 미투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고, '익명' 미투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관심과 신뢰를 갖게 되었다. 심지어 '익명' 미투를 한 피해자에게 실명과 얼굴을 공개해야 믿어주겠다는 희한한 협박(?)을 하는 무리도 있다.실명과 익명의 차이로..

opinion 2018.03.22

맷집

살면서 중요한 것은 맷집이다. 전투력 높은 것도 뭐 중요하겠다만, 맷집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살다보면 잽도 던져야 하고 훅도 날려야 하며, 때로는 제법 강한 어퍼컷도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일단 맷집이 기본은 되어야 써먹을 수 있다. 한방에 나자빠져서야 잽 던질 기회도 없을테니. 진짜 복싱에서는 펀치의 위력이 가장 우선하겠지만, 인생에는 맷집이 더 중요하다.영화 '주먹이 운다'는 맷집의 서글픈 위대함을 보여준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이지만 지금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받고 맞아주는 일을 하는 강태식(최민식). 타고난 건 금수저가 아닌 맷집 뿐. 그거라도 생계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태식의 인생은 밑바닥에서 허욱적거릴 뿐이다. 허세는 태식의 밑바닥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영화에..

opinion 2018.02.12

소심한 보복

아침에 씻고 나와서 뉴스를 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SAMSUNG'. 아 재수 없어 하고 테이프를 뜯어서 발라버렸다. 내가 가진 물건 중 유일한 삼성 제품인 스마트TV. 물론 삼성 물건 안사려고 애쓴지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중고로 TV 사는데 싼 가격에 딱 필요한 기능만 있는. 가진 게 없으면 가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깐. '무노조 경영' 하나만으로도 더러운 기업이구나 했는데, 삼성반도체 노동자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갈 때 산재신청조차 가로막고 돈으로 입막음하려 한 또 하나의 가'족같은' 기업 물건 따위 안사야지 했다. 그러다가 삼성 비자금 & 뇌물 사건 터졌을 때부터는 거의 본능처럼 '삼성' 이름 들어간 건 일단 거부감부터. 10년도 더 전에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의 대형 ..

opinion 2018.02.07

에라이 씨발

씨발놈들.설마 설마 했는데, 역시 건재하다. 삼성. 정권은 바뀌어도 삼성은 영원하다.과연 대법원에 희망이란 걸 기대해도 될까. 2017년 8월 1심 선고공판에서 이재용이 실형 5년을 받았을 때 한 신문기사의 제목은 "삼성공화국은 막을 내렸나"였다. 삼성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는 취지로 읽었던 기억인데, 삼성공화국은 막을 내린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통령 탄핵까지 이끌어낸 우리의 광장은 삼성 앞에서는 턱없이 좁아지고 만다.삼성을 씹었던 글들을 다시 곱씹으며 씨발씨발해야겠다.

opinion 2018.02.05

강용주의 싸움을 지지합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동신고등학교 3학년. 어머니의 울음을 뒤로 하고 항쟁 마지막날 도청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닥쳐오자 도망치고 만다. 그후 의대생이 되었고 학생운동에 나선다.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감옥 안에서 온갖 협박과 고문에도 준법서약서에 무인을 찍지 않고 버티다가 1999년 삼일절 특사로 출소한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국가는 보안관찰이라는 이름으로 3개월마다 경찰서에 무슨 일을 했는지 신고하도록 했다. 인권침해이고 이중처벌이다. 그는 '하지 않을 자유'를 위하여 다시 투쟁을 선택한다.그의 이름은 강용주, 이른바 '최연소 장기수'다. 그리고 2003년 전향제도와 준법서약서는 폐지되었다.양심과 사상의 자유. 한국의 헌법을 온전히 실현..

opinion 2018.02.03

후원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뭐 가끔 메일을 받긴 하지만, 작심하고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장문의 편지글은 거칠게 요약하면 '돈이 없어 할일을 못한다'는 내용이다. 옳은 일을 하는데 돈이 없어 좌절하는 것 만큼 서글픈 일도 별로 없다. 후원하기 웹페이지를 열어놓고 한참 망설였다. 그러다가 지갑을 열어도 되는 이유를 찾아냈다. 올해 월급이 올랐다. 마음 바뀌기 전에 후다닥 정보 입력하고 CMS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단문을 남기고 창을 닫았다.솔직히 망설였습니다. 쥐꼬리 월급에 이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래도 되나'가 아니라 '이래야 한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대신 몸으로 뛰고 계신 분들을 위해 이 정도는 해야 하겠지요. 아직 ..

opinion 2018.02.01

저임금 노동자에게 '파격'은 없다

신세계그룹이 1월1일부터 주35시간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지난 연말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며 홍보에도 써먹었고, '파격'이라는 칭찬도 적지 않게 챙겼다. 시행 한달이 되어간다. 우려했던, 아니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 하다. 역시 저임금 노동자에게 '파격'은 '꼼수'가 되어 돌아온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계의 오랜 숙원인데, 사측의 꼼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뭐 이런 게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을 어떻게 노동자의 것으로 가져올 것인가. 업무 집중도 향상과 효율성 제고와 같은 사측의 논리에도 노동계에서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건 사측의 일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개선을 함께 가져가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도 고민..

opinion 2018.01.24

참사 2

2009년 1월 20일.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참사'라고 했다. 6명이 생목숨을 잃었고, 매년 이 즈음 사람들은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9년째다. 9년 동안 무엇이 해결되었고, 무엇이 달라졌는가. 재개발사업은 '도시재생사업'으로, '뉴타운'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강제철거와 약탈식 재개발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신화와 가난한 사람의 터전을 짓밟고 뻗어 올라가는 건물을 부럽게 바라보는 세태는 오히려 더 견고해지지 않았는가. 당시 진압작전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일본 오사카 총영사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했고 드디어(!)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20대 국회의원(자유한국당)이 되었다. 지난 9년간 이명박근혜 정..

opinion 2018.01.19

인생의 좋은 자세 '아님 말고'

고만고만한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징집당해 모이고, 먼저 온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지며, 서열이 높을수록 어줍잖은 권력을 쥐고 아래 서열에게 뭐든지 할 수 있게 되는 바로 그곳. 현대성은 고사하고 근대의 합리성조차 들어오기 전에 모조리 반납했어야 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곳. 거기서 나는 성선설을 선택했다. 물론 맹자의 성선설 같은 동양철학을 고민한 결과는 아니고. 저들은 원래 착한 사람들인데 군대라는 특수조직이 악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거라고 믿기로 했다는 거다. 맹자의 비유대로 물은 원래 아래로 떨어지는 본성을 갖고 있는데 외부의 힘에 의해 산위로 거슬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외부의 힘'을 선한 것으로 바꿔놓으면 원래대로 선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나름대로 논리적인 전개.라고 하지만 중2 수준의..

opinion 2018.01.14

개헌을 위하여

2018년 한해동안 한국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개헌이지 않을까. 아직 연초라서 그런지 개헌을 하긴 하는건가 싶은 미적지근한 분위기이긴 하다만.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기자회견에서 개헌을 언급하기도 했고 앞으로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긴 할거다. 6월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할건지 다음에 할건지 여의도의 진흙탕 싸움이 예상되긴 한다만, 어쨌든 개헌은 할 것이다.개헌 한다고 세상이 갑자기 장밋빛이 되는건 아니다만, 국가와 사회의 기본 원칙을 다듬고, 법률 이하 제도와 규정을 강제하는 최상위법이라는 면에서 개헌은 중대사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다.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큰 그림 완성하기 전에 우리의 요구를 마구잡이로 내던져야 하는 거 아닌가. 개헌은 기회다. 단순히 헌법을 고치는 선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

opinion 2018.01.12